괜찮니?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세 모녀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을 안타까와하며 본문

36.5+/기획기사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세 모녀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을 안타까와하며

중앙자살예방센터 2014. 3. 31. 10:38

 

 

 

세 모녀 사건에 대한 안타까움을 안타까와하며

박형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안타까운 죽음을 줄일 수 있다면 

생활고에 시달리던 60대 초의 어머니가 30대의 미혼인 두 딸이 함께 목숨을 끊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2014년 2월 27일의 일이었죠. 이분들은 집주인에게 "주인 아주머니,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분들은 어머니가 식당에서 일해 번 돈과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오다가, 어머니가 팔을 다쳐 일을 쉬게 되자 생활이 어려워졌고, 밀린 집세와 공과금을 걱정하면서 함께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겠습니까마는, 이분들의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여러 가지 정책들이 모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와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첫째, 이분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채를 지고 있으면서도 공과금과 집세를 밀린 일이 없었고, 더구나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을 남기고 돌아가셨다는 사연, 둘째, 온가족이 모두 함께 돌아가셨다는 상황, 셋째, 그래서 어쩌면 이들의 죽음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쉬움만 가지고 있을 여유가 이미 우리에게는 많지 않습니다. 이분들과 비슷한 이유로, 혹은 전혀 다른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분들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와하는 내용들을 조금 더 생각해봄으로써, 이와 같은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한명이라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사진 : 박형민연구원님 제공>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할수 밖에 없는 사람들

돌아가신 분들의 사연을 살펴보면, 그분들은 부채가 있기는 했지만 정말로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었나 봅니다. 어머니께서는 지병이 있었지만 식당일을 하시면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셨고, 딸은 취직해서 신용불량의 처지를 벗어나려 애쓰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그분들의 삶은 위태로운 외줄타기 모습과 다름없었습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어지고, 다시는 올라오기 힘든 외줄타기 말입니다.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셨던 어머니가 팔을 다치면서 그분들은 외줄에서 떨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분들처럼 애쓰고 애써야만 겨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은 아직은 버티시고 계시지만, 조금만 바람이 불어 넘어지신다면 다시 일어나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새 우리 사회는 한번 넘어지면 일어나기 힘든 사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넘어진 많은 분들은 혼자 힘으로 일어나고자 하나 그러기에 너무나도 힘든 고통을 겪어야 하고, 그 고통을 감내한다 하더라도 일어설 수 있는 확률은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더욱 염려되는 것은 이렇게 위기상황에 놓여있든 분들 중에는 외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지만, 현재 우리의 복지 체계는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분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살을 적극적으로 고민하시는 분들이 외부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라는 기대도 거의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분들에 대한 지원이 가능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족에게 책임이 넘겨진 사회복지 서비스, 그리고 살해후 자살

우리 사회에는 위의 사례와 같이 가족단위의 죽음을 결정하는 사례들이 적지않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보도에 따르면 위의 세모녀의 경우 모든 가족 구성원이 자살에 동의하고, 죽음을 함께 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은 가족단위의 죽음은 우리 사회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서구 산업사회와 달리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나의 생존과 가족의 생존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성은 전통사회의 가족주의가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가족을 떠나서는 따로 생존할 수 없게 만드는 우리사회 구조의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국가나 사회가 제공하지 못하는 여러 복지 서비스를 가족이나 친족에게 전가시켜왔습니다. 양육이나 간병과 같은 돌봄서비스는 물론이고, 경제적인 상호부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사회복지 서비스는 사회적으로 제공되기보다는 가족의 헌신과 애정에 의존하였다고 보여집니다. 아주 최근에 들어서야 이것이 사회적 서비스라는 인식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떤 사람의 취약성은 다른 가족에 의해서 보완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든지, 간병을 담당했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다른 구성원을 보완해 주었던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생겨 더 이상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이것은 어려움이 발생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문제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겠지요.


세 모녀의 사례는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가족단위의 죽음의 유형에는 다른 가족 구성원을 살해한 후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가 더 자주 나타납니다. 이때 살해되는 가족 구성원은 어린 자녀, 정신질환이 있는 자녀, 지병이 있는 부모나 배우자 등 돌봄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가족 구성원을 살해하는 사람은 이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았던 부모이거나 가장들이 대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가족의 생존을 책임졌던 분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죽는다면 남아있는 가족 구성원들 역시 살아내기 힘들다는 판단을 하셨을 것이고, 이러한 판단이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행위를 정당화시켰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가족에 대한 과도한 동일시가 이루어지고, 가족, 특히 자녀의 생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피양육 가족에 대한 잘못된 소유관념이 결합된다면, 이와 같은 유형의 자살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것이라는 안타까운 전망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대책마련의 필요성

많은 분들이 세 모녀 자살사건으로 알려진 위의 사례를 보고,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조금만 받을 수 있었더라면’, 아니면 ‘이들에게 누군가 한걸음만 더 다가갔더라면’, 혹은 ‘이들이 그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고 있기라도 했다면’ 그들은 죽음이라는 선택이 아닌 다른 선택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상황이 달라졌어도, 이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생각은 원칙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은 막을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자살을 막는 것에 실패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실패를 경험하시고 이로 인해 고통받는 분들에게 죽지 말고 살아 남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살아 남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러한 조건도 함께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조금만 위기가 닥쳐도 쓰러져서 일어나기 힘든 사회가 아니라, 아무리 처절한 실패를 겪었더라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은 영위할 수 있는 사회라면 자살을 선택하신 분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이 아닌 다른 선택을 하셨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 봅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분들의 죽음 이후 서울시와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대책들을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소들을 이미 많이 잃었지만, 아직 남은 소들이라도 잘 지키기 위해 외양간을 잘 고쳐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박형민 연구원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자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있다.

폭력과 죽음에 관한 사회학적 설명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강력 범죄, 폭력 범죄, 자살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지은책으로는

『살인범죄의 실태에 관한 연구』, 『방화범죄의 실태에 관한 연구』, 『한국의 자살 실태와 대책』, 『자살, 차악의 선택』 등이 있다.

 

 

 

Comments